펠레
머리는 가슴에게 이야기하고, 가슴은 발에게 이야기한다.
브라질의 前 축구인.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다. 본명은 에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Edson Arantes do Nascimento)이며, 펠레(Pelé)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축구 황제(The King of Football)라는 칭호가 붙은 인물로, FIFA 월드컵 3회 우승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이며, 디에고 마라도나와 FIFA 세기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브라질 정부에서 펠레의 현역 시절때 유럽 구단의 영입을 막기 위해 그를 국외 반출
불가의 국보로 지정하기도 했다.
펠레의 어린시절
‘펠레’로 알려진 그의 이름은 별명이다. 브라질 흑인 혈통의 아버지 돈지뉴의
친구였던 골키퍼 “빌레(Bilé)”를 어린 펠레가 제대로 발음을 하지 못하고 “펠레”로
발음해서 생긴 별명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고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다.
1977년에
발간된 펠레의 자서전에서도 펠레라는 별명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적혀 있었고,
한참 후인 2010년 10월경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는 펠레 본인이 이와 같이 밝혔다.
참고로 빌레는 포르투갈어가 아니라 히브리어로 기적이라는 뜻이고 펠레는 흑진주라는
뜻으로 붙여진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자신의 별명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펠레가 살던
골목의 동네 친구들이 그를 펠레라고 부르며 놀려 대기 시작했고, 펠레는 그 때문에
친구들과 싸우기도 했다. 펠레의 원래 이름인 이지송(Edison)은 아버지 돈지뉴가
지어준 이름인데,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의 이름을 따서
붙여준 것이다.
이는 당시엔 유명인 혹은 위인의 이름을 자식의 이름에 넣는 경우가
있었고 돈지뉴가 에디슨을 존경해 그처럼 위대한 인물이 되라고 지어준 이름인데,
이 이름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던 펠레는 이지송이라는 이름을 무지 사랑해서 이상한
별명으로 부르던 주위 사람들과 자주 다툰 것이다. 덧붙여 돈지뉴는 펠레의 이름을
호적에 올릴 때 i자를 빼고 “이드송(Edson)”으로 올리려고 했지만 서류 절차상
실수가 생겨서 기록상으로는 이지송이 되었다.
어찌저찌 펠레란 별명이 굳어져버렸고 학교에서도 그를 펠레라 부르기 시작하자
그는 학교에서도 싸웠고 이틀간 징계를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까지 그를
펠레라 부르게 되자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후에 스타가 된 후 그는 펠레란
이름을 신이 주신 이름이라며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펠레의
가족들은 그냥 이지송의 애칭인 지쿠(Dico)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브라질의 흔한 빈민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준프로 선수로 뛰었는데 보잘것 없는 선수 수당 때문에 시간제 근무까지 하면서 생활비를 보탰다. 펠레는 아버지가 자신보다 헤더 실력만큼은 더 뛰어났었다고 회고했다.
아버지는 선수 생활 시절 헤더로 축구 역사상 단일경기 최다 헤더 골 기록인 5골을
넣었던 적도 있지만 자신은 그렇게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상대 팀과의
경기 도중 강한 태클로 무릎이 부서지는 끔찍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럼에도
펠레의 아버지답게 기어코 재활에 성공했고 시청에서도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펠레의 가족은 바우루로 이사하였고, 펠레도 축구를 배울 수 있게 됐다. 이때
펠레는 담배에 손대며 흡연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직접 담배 값까지
주며 “담배를 피고 싶다면 돈도 줄테니 담배를 사서 피워라. 대신 그만큼 몸은 빨리
망가질테니 니가 원하는 축구도 그만큼 빨리 끝날 것이다” 라는 말에 담배값을
돌려드리며 담배를 끊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펠레는 공부는 별로 좋아하지 않고 축구를 좋아했으며, 조종사를 비롯한
여러 장래희망을 갖기도 했고, 가끔 무서운 일이 생기면 어머니에게 응석도 부리는
약간 소심할 뿐인 평범한 아이였다. 당시의 펠레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멘토는 아버지
돈지뉴였는데, 아버지는 자신이 못 이루었던 꿈을 아들에게 물려주어 그를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로 만들고자 하였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노하우를 펠레에게 전해주었다.
축구 선수로서 가져야할 기본적인 스킬과 마음 가짐은 물론이고 심지어 관중을 다루는
법까지 가르쳤다.
펠레가 10살이 되던 해에, 브라질 전역을 충격에 빠뜨린 마라카낭의 비극이 일어났다.
당시 펠레는 라디오로 경기 중계를 듣다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으로 보았고, 아버지를
위해서 브라질을 월드컵에서 우승시킬 것을, 그리고 우루과이에 복수할 것을 예수상
앞에서 맹세한다. 자서전에 보면 예수상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며 간절히 기도했다고
나와 있다. 펠레는 실제로도 신앙심이 매우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펠레는 동네에서 축구를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한편 아버지 돈지뉴의 전
소속팀이었던 바우루 AC에서 유소년 팀을 만들면서 그 코치로 위대한 멘토
바우데마르 지브리투를 데려왔다.
그리고 펠레는 바우루 AC의 지브리투의 소개로 상파울루주의 떠오르는 강호, 산투스
유소년팀에 들어가게 된다. 산투스 FC는 당시 지투, 페페 등 젊은 선수들을 바탕으로
스쿼드를 재정비하던 팀이었다.
산투스 유소년팀에서 훈련을 받던 펠레는 2번이나 무단 이탈을 감행한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자신의 왜소한 체격에 좌절감을 느꼈을 때, 다른 한 번은 4살이나 어린
선수들과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하였을 때였다. 펠레는 유소년 팀에서 이탈하려고
할 때마다 팀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허드렛일을 하던 사부라는 친구에게 걸려서
다시 숙소로 되돌아갔다.
이 사부라는 인물은 멘탈이 완전히 깨진 펠레를 잘 달래서 다시 축구에 전념하게
만들도록 도와준 인물이다. 작은 체격에 좌절감을 느꼈을 때는 “네가 바우루 시골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거다. 만약 지금 먹는 속도대로 계속 먹다보면 조만간
너는 산투스 제일의 뚱보도 될 수 있다”라는 식으로 말하며, 펠레의 가방을 빼앗아
다시 방 안에 던져 넣었다.
페널티킥 실축 사건 때 사부는 대뜸 펠레의 방에 쳐들어갔다. 펠레가 울면서 짐을 싸고 있는 모습을 보자 사부는 좋은 구경했다는 식으로 펠레의 속을 긁었다. 펠레가 페널티킥 놓친 걸 말하느냐고 답하자 사부는 “맞다. 그런 식으로 페널티킥 날려 먹는 사람은 처음 봤다” 라고 말했고, 펠레는 엄청나게 화를 냈다. 하지만 사부는 침착하게 “네가 롤모델로 삼고 있을 산투스의 스타 플레이어들도 연습이든 실전이든 페널티킥 엄청나게 실축하던 거 내가 다 봤다. 누구나 다 하는 실수니까 풀 죽을 필요 없다” 라고 말하며 화나 있던 펠레를 달래주었다. 사부는 배움의 혜택을 받지 못해 허드렛일만 많이 했을 뿐이지 매우 지혜롭고 설득도 잘 하는 인물이었는데, 사부의 진심어린 설득 덕분에 축구 황제 펠레가 다시 힘을 얻은 것이다.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펠레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집으로 도망쳐왔는데, 지브리투 코치가 집까지 찾아와서 끌고 갔다고 한다.
펠레의 업적
20세기 기준으로 다수의 매체에서 역대 축구 선수 중에서 1위로 꼽혀왔으며, 21세기인 현재도 각종 축구 매체들이 선정하는 역대 선수 랭킹에서 리오넬 메시, 디에고 마라도나와 더불어 TOP 3에 거의 고정적으로 포함된다. 현 피파 회장인 잔니 인판티노부터가 1970년생이고 펠레가 너무 오래전 선수라 그의 플레이를 직접 본 사람들은 고령으로 사회에서 은퇴하거나 점점 사망하고 있다는 점이 마이너스 요인이지만 축구가 세계 최고 인기종목으로 올라가는데 큰 공헌을 한 선수이자 선구자라는 점, 월드컵 커리어면에서 다른 선수들보다 압도적인 점 등으로 인해 펠레는 여전히 상징성, 업적, 실력 모두 빠지지 않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반열에 드는 대선수라고 할 수 있다.
수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펠레가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 중 하나로 꼽혀왔던 이유는 펠레와 비슷한 급이라 평가받는 극소수의 선수들조차 ‘확실히 펠레의 위상을 뛰어넘었다’라고 대다수에게 인정받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즉 커리어가 평가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펠레는 국가대표팀과 클럽 양쪽에서 축구 선수로서 이룰 수 있는 사실상의 모든 것을 이룬 인물이다.
펠레는 20세기 전세계 스포츠의 아이콘 중 하나로, 펠레를 단순히 축구 선수로 한정하지 않고 전체 운동 선수로 평가를 해도 펠레가 축구 대표로 뽑혀온 만큼 그는 전체 스포츠계의 상징 중 하나였던 선수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의 거의 모든 축구 관계자들이 동의하는 바이다. 또한, 축구라는 스포츠를 상징하는 인물답게 브라질 내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칭송받으며, 실제로 브라질 역사상 가장 세계적 인지도가 높은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은퇴한 지 얼마 안 된 1981년에 플라카르에서 세계 각국의 축구 전문가 70인에 의뢰하여 역대 베스트 11을 뽑았을 때에는 단 한 명을 제외하면 모두 펠레를 자신의 팀에 집어 넣었고, 20세기 말 각종 세기말 조사에서 펠레가 축구 선수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그도 그럴 것이 20세기 시절 펠레는 축구를 넘어서 스포츠 전체를 대표하는 선수였다. 1999년에 IOC는 농구의 마이클 조던, 복싱의 무하마드 알리를 두고 펠레를 20세기 최고의 스포츠인으로 선정했다. 특히 당시 조던은 두 번째 쓰리핏을 성공시켜 이미 업적으로 봐도 농구 1인자로 굳혀진데다 현역이기까지 했기 때문에 위상이 어마어마했음에도 펠레가 뽑혔다.[78]타임지에서 뽑은 20세기의 인물 100에도 축구계 인물로는 유일하게 들어갔고 무하마드 알리, 재키 로빈슨과 함께 스포츠 분야의 3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다만 펠레의 활동 시기가 워낙 과거의 일이라 펠레의 플레이를 담은 영상은 거의 소실된 상태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하니 펠레는 실력 논쟁이 펼쳐질 때마다 언제나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다. 또한 1960년대 남미 리그 수준과 무관하게 유럽에서 뛰지 않았던 점도 펠레에 대한 저평가 요인 중 하나였다.
그래도 2004년의 펠레의 다큐멘터리 영상 ‘펠레 에테르노’를 시작으로 펠레의 영상 자료가 과거에 비해 많이 발굴되었다. 또한 적은 표본이긴 하지만 옵타 등 스포츠 통계 사이트에서 골 기록 외에도 도움 기록과 키패스 등 다른 스탯에서도 현재의 슈퍼스타들에 모자를 것 없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더욱이 옵타의 월드컵 기록은 1966년 대회부터 기록되었는데 1966년 대회는 펠레가 계속 부상에 시달리다가 주앙 모라이스의 더블 백태클로 신체적 전성기가 끝난 대회임을 감안하면 이 기록은 펠레의 진면목을 전부 보여주지 못하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골 기록만 존재하고 영상 자료는 없던 과거에는 펠레가 단순히 골만 많이 삽입하던 전형적인 스트라이커란 폄하도 있었지만, 현재는 영상 자료들로 인해 축구팬들에게 인사이드 포워드적인 부분과 축구 전반에 뛰어난 컴플리트 포워드로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펠레는 축구 역사상 유일한 월드컵 3회 우승 선수이며, 이 중 두 개의 대회에서 팀의 에이스급 활약을 하며 우승을 이끌었다. 여기서 괄목할만한 점은 1958, 1970 월드컵 모두 펠레의 전성기와 겹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펠레가 펼친 퍼포먼스의 정점은 1960년도 초중반으로 귀결되는 편이며, 클럽 레벨에선 리그, 인터컨티넨탈컵,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모두 가릴 것 없이 폭격하던 시기다. 축구를 넘어 최고의 스포츠 대회라 할 수 있는 월드컵에서 최고의 업적을 남긴 것이 펠레가 축구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FIFA 클럽 월드컵의 전신인 인터컨티넨탈컵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는 각각 2회 우승했다. 소속팀 산투스는 남미 클럽 대항전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를 4번 밖에 참가하지 못했는데 그 4번 중 2번을 우승했다. 브라질 전국대회 우승, 준우승팀의 자격으로 2번 더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지만, 소속팀의 기권이나 브라질 축구협회의 반대 등의 이유로 불참했다.
커리어의 우열을 가리는데 펠레의 유럽 무대 경험이 없음을 지적하는 것은 오류다. 펠레 시대는 남미와 유럽이 축구계를 양분하던 시대였고 지금처럼 최고 클래스 선수들이 유럽에 쏠린 상황과는 다르다. 자세한 내용은 세부 사항에 후술되어있다. 브라질로 들어가면 전국 대회에서 6회 우승과 득점왕 3회를, 상파울루 주립 리그에서 10회 우승과 득점왕 11회를 달성했다. 산투스의 통산 우승 횟수가 2011년 우승까지 포함하여 19회이니 아직 통산 우승의 반 이상을 펠레 시절에 이룬 것이다. 이렇게 펠레는 국가대표팀 뿐만 아니라 클럽에서도 대부분의 대회를 호령했다. 유일하게 펠레가 우승하지 못한 대회라면 남미의 국가대항전인 코파 아메리카인데, 이 대회 역시도 브라질 축구협회의 반대로 단 한 번 출전했다. 그 유일한 출전에서 팀은 준우승에 그쳤지만, 펠레는 대회 MVP와 득점왕을 모두 차지했다.